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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할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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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할게업



드디어 며칠 뒤에 이삿날이었다. 미리 짐들을 박스에 챙겨넣은 후였다. 17평 아파트에 7명 남자끼리 부둥부둥, 한 방에서 다 같이 자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상하게 벽지도 화장실도 베란다도 눈 가는 곳은 다 파란색이었다. 집주인 취향이었던 것 같았다. 새로 가는 집 인테리어는 윤기형이 했다고 했는데, 윤기형이면 믿을 만했다. 형들은 이사를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자! 라고 다 같이 외쳤었다. 데뷔한 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간다니. 이 나이에 하긴 어색한 말이지만 세월이 빨랐다. 데뷔전 연말 시상식들을 모두 챙겨보면서 형들한테 데뷔할 수 있을까요, 가수 하지 말까요, 라는 말들을 많이 해서 형들 속 썩였는데. 윤기형이 이런 거 보지 말고 꺼져! 라고 했었으니 말 다했다. 그냥 그땐 너무 불안했었다. 데뷔가 너무 까마득해 닿지 않을 것 같았으니.
씻고 숙소에서 나와 태형이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논다고 나간 지가 언젠데 12시가 넘은 지금까지 왜 안 들어와. 전화해볼까 싶다가도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는다. 바람이 살짝 불더니 앞머리를 스치고 간다. 집 앞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큰 나무와 일정한 간격으로 길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들. 이제 이 모습 보는 것도 안녕이구나. 몇 년 동안 이 거릴 봤는지. 한 5년 정도 됐나? 손가락을 접어가며 년도를 셌다. 오래됐네. 저 멀리서 오는 형의 모습을 그렸다. 정국아, 라며 내 이름 부르는 형이 선한데.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내가 형을 기다리는 이유는 뭐였는지 다시 되새겼다. 이래야 복잡하기만 한 내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다. 형에 대한 내 감정이 갑자기 물밀 듯 머릿속으로 쓸려왔다.

/

아직 데뷔도 하기 전이었다. 뭣도 몰랐던 16살에 나는 여러 감정에 휩싸였다. 연습생이라는 긴장감과 불안감, 그리고 태형이형에 대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까지.

「형, 저희 데뷔는 언제 할까요?」
「음, 곧.」
「그럴 수 있겠죠?」
「그럼, 무슨 걱정이야. 꼭 데뷔할 거야.」

새벽까지 연습하다 숙소로 돌아가는 밤길에 형에게 저런 질문을 많이 했었다. 자꾸자꾸 묻고 싶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연습하느라 흘렸던 땀을 앗아갈 때, 데뷔를 영영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땀 대신 흘렸다. 그럴 때마다 형은 귀찮은 내색 전혀 않고 곧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형은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내 연습생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줬다. 가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위로해줬던 형이었으나, 유일하게 형에 대한 내 마음만은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게 형 잘못은 아니었다. 형에게 바랐던 내 이상한 감정이 잘 못 한거지. 어린 나는 안될 사랑에 빠진 걸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채 계속 형과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방 불은 다 꺼진 채였다. 석진이형과 윤기형이 잠자리에 예민해서 발걸음소릴 최대한 줄였다. 형보다 먼저 씻는다고 들어왔는데 아마 조금 있다 형이 같이 씻자며 들어올 것이다. 형은 항상 그랬으니까. 둘이 함께 씻고 보송해진 몸으로 침대에 올라가 잠이 든다. 이게 하루의 마지막이었다. 같이 씻고 같이 잠에 드는 것. 하루라도 빠지면 시원찮은.


아 갑자기 그 날이 생각난다. 아마 16살의 크리스마스 당일날이었을 것이다. 태형이형이 연습실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한 말이 메리 크리스마스! 였으니. 형은 멤버들이 아무도 반겨주지 않자 슬쩍 뒤에 숨겨온 케이크 상자를 꺼냈었다. 그러자 석진이 형이 눈을 번뜩이고 태형이형한테 달라붙어 잔뜩 애교를 부렸었다. 다들 연습실 바닥에 둥글게 둘러 앉아 형이 사온 케이크를 젓가락을 파먹었던 기억이 난다. 태형이 형이 초를 안 사오는 바람에 휑한 케이크를 보곤 나무젓가락에 불 붙여볼까? 라고 해서 행동에 옮겼다가 연습실 다 날려버릴 뻔 했었다. -나중에 연습실 cctv를 돌려보다 성득쌤한테 걸려서 혼났었다.- 그렇게 케이크를 먹고 다 같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형이 내가 싸매고 있던 빨간색 목도리를 푸르더니 형 목에 같이 메었다.

「뭐에요.」
「추워. 같이 메자.」

목도리 길이가 길지 않아서 걸으면서 어깨가 떨어질 줄 몰랐었다. 자꾸 부딪혀오는 형의 어깨를 의식해서 어깨가 닿을 때마다 움찔했었다. 부끄러워 몸을 좀 떼려고 하면 목도리가 목을 조여와서 어찌어찌 할 줄을 몰랐는데 형이 내 반대쪽 어깨를 잡고 끌어안았다. 너무 가까워져서 놀랐다. 내가 형을 올려다보자 형은 한 번 씩 웃어주었다. 형의 목에 둘린 내 빨간색 목도리가 참 어울렸다.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형한테까지 들릴까봐 초조해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갤 숙여서 걸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왜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걸까, 싶었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날 간절하게 만들어서 듣기 싫은 소리로 생각했다. 듣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들리던 쿵쾅이던 소리. 형에게 들리지만 않길 바라면서 멤버들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둘이 발맞춰 걷던 그때의 크리스마스. 평범한 25일이 될 뻔했던 크리스마스는 태형이형 덕분에 달력 숫자처럼 빨갛게 물들었었다.


또, 17살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형이 그렇게 다정한 면도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던 날. 형은 날 위로해줬지만 내 눈물만 더 쏟게 만들었던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그날따라 보컬 쌤의 호통소리가 연습실을 크게 울렸다.

「전정국! 자꾸 정신 안 차릴래?」

그의 원인은 나였다. 쌤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어릴 땐 어리숙 해 매일 혼나기 일쑤였다. 그날은 유독 많이 혼났다. 혼난 이후로 또 혼났다. 분위기도 쎄했고 쌤이 나 싫어하는 거 아닐까 싶다가도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정신 차리고 집중하자는 말만 되새겼다. 혼나면 혼난만큼 더 잘하고 싶었다. 나한테 실망하기도 했지만 자책하거나 반성할 틈도 없이 연습은 반복되었었다. 평소보다 늦은 새벽까지 혼자 연습실을 지켰었다. 벌써 자고 있을 시간에 연습실 의자에 앉았다. 그날 처음으로 가진 쉬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깊게 잠겨있던 한숨을 토했다. 쌤한테 혼나면 내가 잘못한거고,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그때를 버티긴 했는데 이렇게 혼자 있을 때 새벽이 찾아올때면, 마음속에 있던 우울함이 툭 튀어나오곤 했었다. 15살에 기세 좋게 연예인한다고 혼자 서울 올라왔는데, 너무 힘들었으니까. 어린 내가 쉽게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아이돌 되기 이렇게 힘든건가. 멤버들과 빛날 미래를 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럴 땐 누가 어둠속에서 내 발목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연습실 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태형이형이 편의점 비닐 봉투를 흔들더니 입을 네모나게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어두웠던 발밑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구가!」
「아, 형. 아, 진짜 엄청 놀랐잖아요.」
「우리 정국이, 놀랐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형은 흐흫, 하고 웃더니 내 앞에 털썩 앉더니 들고 온 편의점 봉투를 풀렀다.

「형이 이 새벽에 편의점을 털어왔다.」

편의점 봉투엔 과자, 삼각김밥, 컵라면, 핫바등 편의점 음식들이 있었다. 돈도 없으면서 이런 걸 다 사왔데. 편의점 비싼데. 형 앞에 털썩 앉았다.

「늦게 이런 거 먹음 살찌는데.」

내뱉는 말과 다르게 핫바 하나를 집어들었다. 전자레인지까지 돌린 모양인지 아직 따뜻했다. 포장지를 뜯어 입에 넣자 형이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살 안 쪄. 라는 말도 해줬다. 형이 살 안찐댔으면 안찌는거지 뭐. 볼 안 가득 핫바를 넣었다.

「근데 왜 다시 왔어요. 숙소 간 지 몇 시간 지났는데.」
「너 돌아올 때 밤길 무서울까봐.」
「안 무섭거든요.」
「뻥이고, 너 속상해하고 있을까봐.」

보컬쌤한테 된통 깨진 걸 보고 말하는 것 이었다. 뭐 안속상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괜히 짜증나고,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싶고. 더, 더 열심히 하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실력은 차이가 나고.

「또, 데뷔 언제해요, 너무 힘들어요, 아이돌 하지 말까요. 같은 소리 할게 눈에 선해서 잠 못들고 뛰어왔어.」
「어떻게 알았데.」
「내가 전정국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

거짓말. 나는 형 모르게 내 마음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핫바를 이어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었다. 무슨 맛인지는 모른다. 한 입 베어물었다. 참치마요였다. 딱 형 취향이네.

「너무 마음 쓰지 마.」
「…….」
「네가 정말로 못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우리 팀중에서 최고는 넌데.」

또 아이돌 하지 말까요, 라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럴 때마다 형 심장은 아주 철렁해. 형이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삼각김밥을 한 번 더 물었다. 다정함 가득 묻은 형의 말에 목이 콱 메어온다.

「알았어요.」
「그래, 착한 정국이.」
「아, 형. 저 눈물 많은 거 알면서 이러기에요?」
「헉, 정구기 울어?」

형이 놀란 척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이 화끈해져 고갤 들 수가 없었다. 아까 혼자 자책했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놀리지마요.」
「울지말고, 일루와 형이 특별히 안아줄게.」

형이 내 바로 앞까지 몸을 끌어와서 내 어깰 안는데, 울음이 안 터질 수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졌고 결국 눈물 뚝뚝 흘리자 형이 더 꽉 날 안았다. 형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내 눈물이 형의 어깰 적셔갔다. 형이 내 등을 일정하게 두드려줬는데 왠지 모르게 따뜻해서 더 울었던 것 같다. 그때 연습생이라 불안하고 힘들었던 일이 다 씻겨내려가지 않았을까.


17살이 된지 두어달이 지난 그날은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데뷔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온 멤버가 손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다른 형들은 어지럽다며 한명씩 쓰러지고 나만 마지막까지 방방 떴었다. 이제 음악방송에서 방탄소년단 이란 아이돌이 나올거고, 내가 무대에서 노랠 부를 수 있을 것이었다.

「야, 진짜 잘하자. 연습 더 빡세게 하고.」

윤기형이 말했다. 서로 손 겹쳐 방탄 파이팅! 까지 외쳤는데, 감정이 벅차올라 또 울었다. 그땐 울보였다. 형들이 정국이 울어? 하면 바로 눈물 쏟아내는.

「와, 전정국 맨날 울어.」
「왜그래, 우리 정국이한테.」

남준이 형이 우는 날 놀렸고 그런 남준이 형을 석진이 형이 다그쳤다. 형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내 어깰 두드려줬다. 평소라면 남준이 형한테 놀리지말라며 짜증냈겠지만 헤헹, 하고 웃어버렸다.

「형, 전정국 울면서 웃어요!」

지민이 형이 그걸 보곤 소리쳤다. 태형이 형이 내 머릴 헝크리더니 뒤에서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전정국, 이제 데뷔 언제하냐고 노래안해도 되겠네.」

바로 귀 옆에서 말한 태형이형의 크고 낮은 목소리가 너무 간지러웠다. 기분이 가장 좋았던 날이었다.
그 날 기쁜마음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잤는데 다음 날 내 기침 소리에 깼다. 일어나보니 몸이 너무 무거웠었다. 몸이 무거워 침대 안쪽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머리도 윙윙, 울리는 것 같고. 이상한 몸상태에 누워 끙끙댔는데, 옆에서 자고있던 태형이형이 들었는지 깨서 내게 물었다.

「왜 끙끙대?」
「혀엉….」
「왜 그래.」

힘들게 입밖으로 꺼낸 말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목 안에 모래를 들이부은 것같았다. 목소리를 듣고 형이 놀라 벌떡 일어나 내 침대로 넘어왔다. 기침이 나왔다. 감기인가, 단순 감기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전정국, 아파?」

형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몰랐는데 앞머리가 살짝 땀에 젖어있었다. 뜨거운 이마에 놀란 형이 자고 있던 윤기형을 깨웠다. 아까 형 소리 한번 했더니 목이 너무 아팠다. 몸을 억지로 일으켜 보았다. 반 정도는 일어났는데 눈앞이 어지러워서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콜록, 기침도 나왔다.

「형, 형 윤기형. 일어나봐요.」
「씹, 왜….」
「정국이가 아픈가 봐요, 열 엄청 나요.」
「뭐?」

태형이형의 말에 놀라 윤기형이 벌떡 일어났는데 대꾸해줄 힘이 없어 숨만 색색, 내쉬었다.

「전정국, 괜찮아?」

윤기형이 내게로 와 물었다. 괜찮다고 해야 할지 안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 말 안했는데, 기침이 자꾸 나왔다. 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봐, 일어날 수 있겠어? 병원부터 가자.」

윤기형은 침착하게 날 일으켜 세워줬다. 눈앞이 일렁였다. 어지러웠다. 형의 도움을 받아 대충 겉옷만 걸치고 숙소 밖을 나왔다. 태형이형도 따라나서겠다고 했지만, 윤기형이.

「넌 남아서 얘들한테 알리고, 매니저 형한테도 연락해. 전정국은 내가 데려갈테니까.」

라고 했었다. 윤기형과 같이 택시를 타고 집 앞 병원으로 갔다. 기본 요금이 나오는 거리였지만 내가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윤기형 어깨에 기대 뜨거운 숨을 뱉었다. 기침도 계속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진료를 받으니 몸살감기라고 했다. 열은 38도가 나왔다. 감기몸살이 원래 이렇게 아픈가. 약을 지어 바로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형들이 달려나와 어디가 아픈건데! 라고 물었다. 윤기형은 담담하게 몸살났데, 라고 말해줬다. 형들 걱정사이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이 더 노곤해진 것 같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누운 지 일 분도 안돼서 잠에 든 것 같다.
한참 자고 눈을 뜨니 그제야 좀 몸이 괜찮아진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태형이 형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형은 내 옆침대에 내쪽으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태형이형.」

하고 불러봤는데 목소리가 영 나오질 않았다. 두어번 기침을 했다. 형의 갈색 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형이 비몽사몽한 채로 고갤 들었다.

「형.」

내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형이 반쯤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정국아!」
「왜 그러고 자고 있어요.」
「아, 너 지켜보다가 그만…. 얼마 안잤어!」

형이 결백하다는 듯 핸드폰 시계를 비췄다. 아까 병원에서 본 시계는 9시쯤이었는데 지금 시각은 4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형은 시간을 보더니 당황한 듯 했다.

「잔지 얼마 안됐는데…네시간이나 지났네.」

웃음이 났다. 일어나자마자 형의 얼굴을 봐서 좋았는데, 이런 형의 모습이 귀여워서.

「나 걱정했어요?」
「그래! 너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미안해요.」

혹시 형이 더 걱정할까 웃어보였다. 내 웃음에 형도 안심한 눈치였다.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켰다.

「약 먹어야지, 죽 데워 올게.」
「죽이요?」
「어, 기다려.」

형이 방 밖으로 나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에 죽 없는데, 언제 또 사와서. 전자레인지가 다 되었다고 삐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금방 뜨거운 죽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죽 냄새가 확 풍겼다.

「사왔어요?」

입맛이 없는데 먹지 않으면 형이 걱정할테니까. 숟가락을 들어 죽을 호호, 불었다.

「그래, 내가 너 때문에 죽집까지 달려가서 사왔다.」
「형이요?」
「그럼 나 말고 누가 사와.」

어느정도 식은 죽을 입안에 넣었다. 텁텁했던 입안에 따뜻한 죽이 들어왔다. 형이 사왔다니까 입에 잘 들어갔다.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또 아파서 죽 사오게 하기만 해봐.」

어느정도만 먹고 그만 먹으려했는데 죽 한그릇을 싹 비웠다. 형이 내 옆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탓이었다.

「죽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왜.」
「형이 너무 뚫어져라 보잖아요.」
「안 그럼 다 안 먹을거잖아.」
「…….」
「들켰지?」
「네.」

형은 나에게 전정국 멍청이, 라고 했다. 빈 그릇을 가져가더니 컵에 물 가득 채우고 약 봉투를 건넸다.

「좀 있다 약 먹고.」

약 봉투를 열어 약 하나를 뜯었는데 약 개수도 참 많았다. 그냥 감기몸살이라면서.

「몸은 괜찮아?」
「네, 기침하는 거 빼곤 좀 나아진 것 같아요.」
「다행이다.」

형이 작게 웃었다. 입꼬리가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 두 눈엔 똑똑히 보였다. 그때 형의 작은 웃음이 나에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어놓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안어지러웠다 반복하던 두통은 형의 웃음을 생각하면 더는 아프지 않았다. 자꾸 나와 목을 간질이던 기침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 감기몸살은 형에 대한 열병이라고 내 맘대로 치부해버렸다.

/

상상말고 진짜 태형이 형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두 다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형이 집앞까지 거의 다 닳을때,

“형.”

난 형을 불렀다. 형은 내 목소리에 핸드폰에 두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핸드폰만 보면서 걸으면 사고나요.

“어? 정국아, 여기서 뭐해.”
“형 기다렸어요.”
“오, 형 마중나온 거야?”

형은 내가 기특하다는 듯 엉덩이를 두 어번 토닥였다. 형이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는지 알겠다. 옅은 술냄새가 풍겼다. 술 잘 먹지도 못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형한테 할 말 있어서요.”
“뭔데, 뭔데?”
“며칠 뒤에 이사가잖아요.”
“그치, 아 완전 설렌다.”
“그래서 말하는거예요.”
“응?”
“이사가기 전에 말할래요.”
“말해봐.”

형이 내 눈을 맞췄다. 분명 술 취한 눈인데 너무 깊었다. 숙소에서 내려오면서도 떨리지 말고 말해야지, 를 몇 번 다짐한 것 같은데 형을 이렇게 마주하니 입술새가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어, 형을, 형을요.”
“응.”
“제가 형을, 아씨, 형을, 좋아,”

말이나 더듬는 내 모습을 보고 형이 웃었다. 왜 웃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못했다. 왜냐면 형이 내 얼굴을 잡더니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긴장해서 몸이 굳어졌다. 잔뜩 커졌을 내 눈과 형 눈이 마주쳤다. 형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가 눈을 감았다. 길게 내린 속눈썹을 보다 나도 눈을 감았다. 형이 고개를 살짝 비트니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아랫 입술이 잡아당겨지는게 느껴지더니 안쪽으로 혀가 들어왔다. 알싸한 술냄새와 뜨거운 숨이 섞여 들어왔다. 나까지 취하는 것 같았다.

“전정국 멍청이.”
“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잘 숨기고 있는 줄 알았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했잖아.”
“…….”
“네가 연습생 시절부터 나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언제쯤 고백할 까 싶었는데.”

형이 네모나게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내 마음 고백할걸. 괜히 후회도 됐다. 이런장면은 혼자 그리던 상상과는 좀 달랐다. 혼자 삽질 하고 있었잖아.

“근데 전정국이 말도 제대로 못하네.”
“아, 형….”
“형이 너 좋아해.”
“…….”
“정국이도 형 좋아해?”
“…네.”

부끄러웠다. 고개를 숙여 신발 앞코만 봤다. 형이 내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아, 형 술 잔뜩 취해서 이런 건 아니겠지.

“술 마셨다구, 기억 안난다고 하면 안돼요.”
“술 마신 거 어떻게 알았어?”
“냄새 나요.”
“얼마 안마셨어. 안 잊어버려.”
“진심이죠?”

그럼. 형이 내 손을 잡았다. 정국이 이삿짐 다쌌어? 미리 싸놨죠. 부지런하네. 우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생때부터 혼자 끙끙대던 진심을 드디어 내보냈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아까 형이 한 말이 생각났다.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다는 말.

“괘씸해요.”
“뭐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럼 내가 말하기전까진 말 하려고 안했어요?”
“아니야. 나도, 오늘 말하려고 했었단말이야….”
“오늘요?”
“응, 그래서 술 먹고 늦게 들어온 건데….”
“…통했네요.”

내 말에 형이 그치? 하고 히히 웃는다. 형이 잡았던 손을 깍지 껴 다시 잡는다. 계단을 올라가는 형과 내 발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다. 손을 계속 잡고 싶었다.

/

“정국아, 짐 다 챙겼어?”
“네.”
“나갈까?”
“네.”

형이 다정하게 묻는 입술이 너무 예뻐서 짧게 쪽 하고 뽀뽀해주었다. 형은 또 아, 이런 거 하지마아. 하면서도 좋다고 실실 웃었다. 형이 키스한다고 얼굴을 들이댔는데 내가 안된다고 밀어냈다. 내 거절에 삐진 형이 먼저 앞서 숙소를 나갔다. 나도 손에 짐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뒤를 돌아보니 싹 비워진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 바닥에 창문모양으로 옅게 햇살이 비쳤다. 현관 자동감지기로 현관등이 켜졌다. 열린 방문으로 텅빈 방이 보인다. 파란 벽을 따라 한 번 집 안을 쑥 둘러보다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없는 현관은 현관등이 꺼져 어둡겠지. 그동안 추억이 쌓였던 집을 두고 새로운 집으로 간다. 연습생과 신인 시절 불안하고 겁만 많던 어린 시절과 형을 짝사랑했던 마음은 이제 서랍 한구석에 고이 접어 넣을 시간이었다. 어렸던 나는 정말 안녕이었다.